내가 이런 상태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고백하자면,
현재 나의 성인 ADHD 약물치료는 아주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국에서 나는 결국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내게 맞는 용량을 찾지 못했다. 콘서타 54mg를 3일 먹어보고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 판단하신 의사선생님께서 콘서타 45mg 한달치를 처방해 주셨고, 그걸 받아들고 독일로 돌아온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간 나는 베를린에서 나를 받아주는 정신과를 찾기 위해 병원 80군데를 뒤지고 여기저기 연락하며 노력했지만 번번히 거절만 받아야 했다. 빌어먹게도 거지같은 독일 겨울 날씨 때문에 정신과에 환자가 겨울마다 급증하고 코로나까지 겹쳐 새 환자를 받을 여력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지난 한 달간 나는 약물치료로 아무런 차도를 느끼지 못했다.
업무 성과를 더 높이기 위해서 치료를 결심한 건데,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일하기 싫어지는 나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끼고 기분은 매일 최악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ADHD가 맞기는 한 건지, 왜 약의 효과가 없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가 어쩌면 내가 마치 마법의 약 처럼 지나치게 극적인 효과를 기대한건 아닐까 반성도 하다가 결국 중요한건 내 의지력이라며 의욕을 불태웠다가 또다시 사그라들고 우울해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그 우울감은 어젯밤 정점을 찍었고,
삶이 힘들면 잠으로 도망치는 버릇은 못 버려서 나는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웬일로 밝은 햇살을 느끼며 일어나 보니 벌써 토요일 오후 2시가 넘었고, 잠에서 깬 지 2분만에 햇빛은 사라지고 잿빛 하늘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만 방 안 가득했다. 나는 또 한번 분노했다. 빌어먹을 독일 겨울. 대체 왜 텔레포트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거야. 일론머스크는 뭘 하는 거냐고. 화성이 아니라 지구 내에서 순간이동만 해도 인생 훨씬 행복해질텐데. 지금 스페인이나 남미에는 햇빛이 짱짱할 거라고.
..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로 어젯밤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스페인 숙소를 알아보다 결국 예약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돈도 있고 재택근무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는 예약을 하지 않은 거지? 내가 벌써 재미없는 어른이 된 건가?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하고 싶으면 했었는데. 그게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왜일까. 왜지?
익히 알듯이 ADHD는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라는 병명을 가지고 있다.
내가 스스로를 ADHD라고 의심해본 적도 없는 이유는 내가 주의력 결핍이 심하긴 해도 과잉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여아의 경우 과잉행동은 크지 않고 주의력결핍이 더 크게 나타나는 편이라고 한다. 그동안 매체에서는 주로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과잉행동을 보이는 남아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ADHD의 고정관념이 굳어졌고,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거라 여겼다.
내게 나타난 과잉 행동은 아주 사소한 거였다.
손과 발을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해서 나는 흔히 복 나간다는 다리떨기와 손 꼼지락 거리기를 24시간 내내 했었다. 잘 때도 나는 발을 계속해서 까딱이면서 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과잉행동 보다는 ADHD의 특성 중 하나인 충동성 조절 장애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충동성이 내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ADHD를 가진 사람은 일반인에 비해 뇌에 도파민의 농도가 아주 낮다고 한다. 도파민은 신경 전달 물질이고, 그렇기 때문에 도파민의 농도가 낮은 경우 전두엽의 활성화에 문제가 생겨서 원하는 곳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충동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떤 걸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잘 가늠하지 못해서 지각이 잦고, 남의 말을 끊고, 주변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등 생활에 여러 문제가 나타나는 거다.
또 도파민의 농도가 낮기 때문에 뇌는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1차원적인 자극을 자꾸 찾고, 거기에 몰두하는 경향이 짙다. 게임에 빠지거나, 드라마나 영화에 빠질 수도 있고, 소설책에 빠질 수도 있다. 즉각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면 거기 난데없이 꽂히고, 그걸 꼭 해야만 마음에 평화가 오고, 남이 보면 위험한 행동도 서슴없이 한다. 같은 이유로 아주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는 충동성이 높고, 그것을 잘 억제하지 못하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ADHD를 가진 사람은 사고의 흐름이 어디로 튈 지 모르고 창의력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ADHD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 창의력과 충동성은 줄어드는 걸까? 아예 사라지는 걸까? 내가 그동안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고, 내게 잘 맞는 직업을 주었던 창의력과 충동성이 결국 내 특성이 아니라 순전히 뇌의 문제로 인한 걸까? 주의력과 집중력을 얻는 대가로 헌납해야 하는 아까운 제물일까? 그걸 치료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인생이 재미있는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극적인 것들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인간이라 (실제로 많이 듣는 말이다) 인생에 재미있는 것들이 끊이질 않았다. 사는 건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것들 투성이라, 나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행동반경을 넓혀서 더 많은 모험을 하고 더 많은 재미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실제로 나의 충동성은 내 삶을 풍요롭고 재미있는 추억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다.
남자친구와 사귀기 전 남자친구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내 모습은 아직 집에 가기 싫다며 운전중인 남자친구 차의 핸들을 꺾어버린 것과 9층 자취방 창문에서 다리를 바깥으로 빼고 걸터앉아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 모습이다. 물론 남자친구에게는 좋은 기억이 아니라 아찔하고 경악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지금도 종종 얘기를 할 만큼 강렬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교복을 입고 석벽을 기어오르는 여고생 사진을 봤을 때는 정말로 내 사진인 줄 알았다. 내가 교복을 입고 맨날 하던 짓이고, 나는 그렇게 높은 곳을 보면 꼭 기어올라가서 꼭대기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거길 지나칠 수가 없었다. 스무살이 된 기념으로 혼자서 부산 여행을 갔을 때에도, 그렇게 추운 1월에 나는 해운대 바다를 보며 도저히 수영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배낭만 벗어 놓고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한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대충 말렸지만 여전히 젖은 옷을 입고 부산 시티투어 버스에 올라타는 내 사연을 듣고 버스기사 아저씨는 "니는 넘이 못 가진 걸 가졌다" 하시며 옷을 버스에서 말려줄 테니 저녁에 부산역으로 오라고 하셨다. 덕분에 야간 시티투어 버스도 공짜로 타고, 아저씨께 해돋이를 보기 좋은 숙소와 맛집까지 추천 받기도 했었다. (물론 ADHD 답게? 늦게 일어나 해돋이는 보지 못했다.) 또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새벽에 후드티와 모자를 덮어쓰고 남자인 척 하며 안마방에 들어가 본 적도 있었고 (결국 들통나 쫓겨났다) 새벽에 갑자기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 것 처럼 떠나는 즉흥 여행은 내게 일상이었다.
민폐덩어리였던 경우도 많아서 후회도 크지만, 남에게 피해 없이 혼자 즐거운 경우가 훨씬 많았다.
당장 생각나는 기억들만 적었는데 정말 이런 일화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나?
ADHD는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아지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이미 빼도박도 못하는 성인인데다 ADHD 치료 중이니, 점점 자기절제를 하게 되면서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걸까? 그게 어른의 책임이라는 걸까?
사실 요즘 가장 이기기 힘든 게 중력과 관성이다.
중력에 저항하고 몸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사소한 집안일도 할 의욕이 없어 화분들은 말라가고 부엌은 엉망이고 온 집안에 먼지가 굴러다닌다. 관성에 저항해서 하던 것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힘들다. 마치 아주 무거운 고래가 되었는데 헤엄을 치지는 않고 몸을 뒤집고 둥둥 떠서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느낌이다. 충동성은 아주 하찮게 변했다. 바로 어제도 일하다가 쓸데없는 표 만들기에 꽂혀서 몇시간을 허비했다. 그거 만들면 좋지만 안 만들어도 되는 거였는데..
갓 일을 시작한 신입일때 매우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사수언니가 해준 말은 '중요도를 파악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시간을 많이 쓰지 말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충동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경력 많은 사수언니 눈에는 내가 쓸데없는 것에 의욕을 불태우느라 시간이 괜히 오래 걸리는 게 보였을 테니.
메틸페니데이트라는 약이 주는 효과중 하나가 일에 중요도를 파악하게 해 주는 거라던데.
요즘은 너무 일만 생각하는 것 같다. 일의 중요도가 매우 치솟아서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어렵고 자꾸 쓸데없는 일에 꽂힌다. 아직 치료 효과도 제대로 보지 못했건만 자꾸 답이 없는 생각에 빠진다. 독일의 겨울을 탓해야 할 것 같다. 벌써 한 달째 해를 보지 못하니 점점 우울에 빠진다.
사실 글을 쓰는 게 어렵다. 특히 오늘처럼 약을 먹지 않은 날 심한 것 같다.
글감은 끊임없이 떠올라서 머리를 어지럽히는데, 뭐 하나 끝까지 마무리 짓기가 힘들다.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화면에 띄우는 속도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기엔 터무니없이 느리다. 글을 쓰는 사이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다가, 그 생각에 집중하면 쏜살같이 도망가 사라진다. 나는 멍하니 멈춰 있는데 생각은 너무 멀리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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