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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내이야기

뇌는 개발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 아트디렉터로서 잃은 것과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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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셋 이전의 나는 순도 100% 문과소녀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초중고를 통틀어 학교에서는 매번 글짓기, 독후감, 책벌레 상 등등의 상을 매번 받으며 가장 책을 많이 읽는 학생으로 꼽혔었고, 공부하지 않아도 국어성적은 1등급이었다. 자랑을 차치하고라도 나는 정말 활자중독인가 싶을 정도로 글을 많이 읽었고, 그림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교실꾸미기를 할 때마다 차출되는 경우도 한 번 없었고, 그림 좋아하는 친구들이 사생대회에 나갈때 나는 옆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했으며, 그 흔한 다이어리 꾸미기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학교다닐 때 쓴 일기장을 읽으면 글씨만 빼곡할 뿐 스티커 하나, 손그림 하나 그린 게 없다. 업무일지 같아 보일 정도. 

 

스물 셋 이전까지 나는 내가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방은 항상 지저분했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뭔가를 예쁘게 꾸미는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예쁜게 대체 무슨 소용이람? 알맹이가 중요하지. 라는 일념으로 살았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한창 예쁘게 꾸미는 것에 관심가질 나이에 대체 너는 왜 그러냐며 외모라도 가꿔보라고 성화였다. 

 

처음 광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스무살이었다.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캠페인을 만드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문과인으로서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평생 글만 써 봤고 그림은 그려본 적도 좋아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광고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으면서 본격적으로 외국에 나가서 광고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카피라이터로서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다. 

늘 막연하게나마 외국에서 살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카피를 쓰는 것은 영 자신이 없었다. 영어공부를 더 하고 많이 노력해서 실력을 갈고 닦더라도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기가 막힌 카피를 써서 광고를 할 자신은 없었다. 카피에서 매우 중요한 건 글 감각과 말 맛인데, 이건 문법을 아무리 공부하고 숙어나 속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트디렉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카피라이터와 함께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광고를 만드는 건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광고를 구체화시키고 다듬는 과정에서 글로 윤을 내느냐, 이미지로 윤을 내느냐의 차이인데, 글이든 이미지든 무슨 상관이랴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글이 아닌 비주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좋은 비주얼을 많이 보며 좋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포토샵을 익히고 그림을 그려보고 맘에 드는 작업을 따라 만들어 보는 등 아트디렉터로서의 소양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영화를 보더라도 대사와 이야기의 흐름 보다는 세트디자인, 화면 구성 방식, 전체적인 미장센 등 비주얼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좋아하던 연극과 뮤지컬보다는 미술 전시를 많이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인풋을 위해서 영어원서는 가끔 읽었지만 한글로 된 책은 아예 읽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생각 배설 욕구가 강한 편인데, 그런 생각들을 블로그나 여타 공간에서 글로 풀어내지 않고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웹툰을 먼저 그렸었다. 

 

진짜 버스탈 돈도 없었던 학생 때, 5년에 한 번 열리는 권위있는 현대미술전이라길래 돈을 빌려서 카셀 도큐멘타를 보러 베를린에서 카셀까지 기차타고 갔었다. 올해에도 베니스 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 보러 갈 예정이다.

 

그렇게 5년정도 사고방식 자체를 비틀어 새로운 영역에 집중하고 나니, 나는 아트디렉터로 외국에서 취업까지 하게 되었다. 취업 이후로 나는 좋은 아트디렉터가 되기 위해서 학생 때보다 더 많이 노력했고,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아트디렉터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역할도 하고 온갖 무드보드와 키 비주얼과 레이아웃들을 만들며 광고 캠페인의 비주얼을 디자인하고 디렉트 하기도 한다. 나의 과거 모습만 아는 사람들은 아마 경악할 이야기일 거다. (학창시절부터 만난 오랜 친구들은 아직도 내가 그냥 광고를 만든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뇌를 비틀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1. 좋은 아트디렉터가 되려면 아직도 멀고 멀었다.

배울 것이 산더미인데다 미대출신 정통파(?) 따라잡으려면 가랑이 찢어진다. 그래도 어찌저찌 하고는 있지만 매번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 마다 어질어질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좋은 레퍼런스를 가져갈 줄 알게 되고 보는 눈을 키우고 판단력을 높여 왔지만 그림자, 반사, 구도, 원근법 등의 기초적인 부분이 아직도 부족한 건 말할것도 없고 뭔가를 디자인하는 일 또한 공부를 꾸준히 해도 여전히 자신없고 어려운 영역이다.  

 

2. 카피라이터 쪽으로 계속 발전시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카피라이터로 방향을 잡고 단련해 왔다면 카피라이터 일도 가능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은 든다. 취업하고 얼마 후에는 카피 쪽 능력도 개화시키고 싶어서 영어로 된 작법서나 문학 쪽을 기웃대기도 했었고 글도 써 봤었다.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에는 내 시간과 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나는 아트디렉션에 더 치중하고 집중해야 했다. (광고회사라면 아무리 독일이어도 야근을 한다. 카피라이터들이 빨리 퇴근하고 아트디렉터들만 남아서 야근을 할 때면 괜히 카피라이터로 전향하고 싶은 생각이 꿈틀대기도 했었다. 확실히 일이 더 많긴 하다. 카피랑 아트를 고민중이라면 참고하면 좋겠다.) 

 

3. 그래도 아트디렉터로서 취향과 보는 눈을 길렀다. 

여전히 나는 일이 아니라면 뭔가를 꾸미는 걸 싫어하고, 내 블로그는 아무 멋도 없는 기본형이다. 그런데 이건 관심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하기 싫어하는 거랑 비슷한 것 같다. 이제는 새롭고 멋진 비주얼을 보면 기분이 좋고, 전에는 재미없지만 억지로 봤었던 전시들도 즐겁게 보며 새로운 것을 배워가고 있다. 

 

4. 그러나 글솜씨와 문해력을 잃었다. 

가장 큰 손해이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드는 부분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재미있고 즐겁지만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기가 너무 싫을 정도로 글솜씨가 엉망이 되었다.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내용이 중구난방인데다 결론도 이상하다. 그렇게나 많이 읽던 책과 글을 지금은 많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읽지 않으니 내게서 나오는 문장들도 형편없다. 사고와 논리 전개 과정도 이상해졌다. 전에는 책을 많이 읽어도 주변에 내가 읽은 책에 대해 토론할 사람이 없어 아쉬웠는데 지금은 누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면 무섭다. 내가 전처럼 책 한 권을 담뿍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십 대 초반을 기점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결론을 굳이 내려보자면,

사고방식과 뇌는 훈련하고 단련시키는 방향으로 근육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어릴 때와 달리 나이가 들 수록 다양한 것들을 한꺼번에 잘하기가 쉽지 않고, 한 쪽 방향의 근육을 키우다 보면 다른 쪽 근육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새로운 진로나 방향을 고민할 때, 새롭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잘 할 수 있을까 망설이지 말고 해 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하는 쪽으로 재능을 키워나가다 보면, 대가는 있을지언정 점점 실력이 늘고 기존에 불가능하던 것도 가능해진다. 

 

물론 나도 아트디렉터가 되겠다고 결심해놓고도, 이따금씩 아득하게 느껴져서 과연 될까 의심하고 초조해했었다. 그 때 나를 처음 광고에 입문시킨 남자친구가 아직도 내가 믿고 따르는 훌륭한 조언을 해 주었다. 

어쨌든, 인풋을 끝도 없이 넣다 보면 빵 터지든 조금씩 흘러넘치든 아웃풋은 나오게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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