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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내이야기

인생을 바꿔놓은 열 다섯의 유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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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외국생활을 동경했다. 

그래서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가장 친했던 친구가 필리핀으로 유학을 갔다. 

그땐 잘 몰랐는데, 1년후 방학때 한국에 잠깐 들어온 친구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재밌고 신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당시 그 친구는 교회를 통해서 필리핀 현지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기숙사비도 저렴했고, 당시 필리핀 물가도 굉장히 저렴했기 때문에 학비를 포함해서 총 생활비가 한달에 70만원밖에 들지 않는다고 얘기해줬다. 

 

나는 당장 엄마한테 달려가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엄마한테 들은 답변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우리 집은 너 유학 보낼 만큼의 형편은 안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네가 벌어서 유학가는 건 어떨까?" 

 

한 달에 70만원의 학비도 댈 여력이 없었는지는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 딱히 부유함과 빈곤함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늘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의 설명은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두 달 후, 

영문도 모르고 나는 2주간의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다. 

유치원 엄마들 모임에서 아이들 유럽 여행을 보내서 견문을 넓히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엄마는 고민하다 나를 보냈다. 아마 유학을 거절한 것이 미안해서 큰맘먹고 보내줬던 것 같다. 나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도 몰랐던 유치원 동창들 몇명과 보호자로 오신 한 명의 어머니와 모두투어에서 진행하는 250만원짜리 2주 30인 유럽여행 패키지로 5개국(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를 돌았다. 

 

유럽여행은 당연하겠지만 너무 좋았다. 처음보는 유치원 동창들과 절친이 되어 신나게 깔깔거리며 곳곳을 누볐다. 파리의 명품거리,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작고 오묘했던 모나리자, 판타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던 로마, 실제로 보니 더 커다랗고 멋졌던 런던의 빅 벤. 그리고 지금은 어디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스위스 산골짜기 어딘가의 숙소에서 당시 유행하던 동물 잠옷을 입고 알프스 산맥을 보며 송아지처럼 뛰어다녔던 기억까지 모든 기억이 다 아름답고 좋다. 나는 이 당시 만족할 만한 삶을 산 후에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즐거운 여행이었어" 라고 말하고 에베레스트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 적당한 나이가 되면 알프스 산맥에서 소젖을 짜면서 목장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행사에서는 각자 간식을 사먹거나 기념품을 사라고 용돈을 챙겨오라고 했는데, 엄마는 잘 모르고 내 용돈을 다른 친구들보다 현저히 적게 주셨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곧 아빠 생신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아빠 선물을 사고 나니, 간식 먹을 돈도 기념품을 살 돈도 없었다. 그래도 패키지 여행이니까 크게 불편할 것은 없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남은 유로를 다 쓰고 가라며 독일의 대형 쇼핑몰에서 자유쇼핑 3시간이 일정에 있었다. 어차피 돈도 없던 나는 그냥 구경하러 가는 대신에 혼자 프랑크푸르트 마인 강가를 걸었다. 가이드 아저씨도, 보호자인 친구 어머니도, 다른 투어 사람들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걸어다닌 그 세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였다. 

 

아쉽게도 그때의 사진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며칠 전 베를린인데 얼추 느낌은 비슷한 듯 하다.

 

햇살은 강렬하지만 공기는 습하지 않은 천국같은 독일의 여름이었고, 강가에서 태닝하러 누워있는 사람들, 책 읽는 사람들, 마치 브레멘 음악대를 연상시키는 거리의 악사들과 돌길을 따그닥거리며 굴러가는 마차까지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독일에 꽤 살아보고 나니 프랑크푸르트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아름다운 도시도 아니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의 프랑크푸르트 강가는 내 기억에 선명하고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되면 꼭 혼자서 자유여행으로 유럽에 다시 올 거라고 다짐했다. 

 

여행 후, 나는 한동안 구름을 걷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첫 유럽여행의 여운을 오래도록 즐겼다. 

중학교 2학년, 열다섯의 여름은 그렇게 한 번의 작은 좌절을 겪은 후 아름답고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리고 이건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여름이었다. 이 때 이미 머릿속으로 시골을 벗어나 넓은 세상에서 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단단히 섰기 때문이다. 

 

아주 약간 서글펐던 건, 

이 유치원 동창 모임에서는 이후로도 1년에 한번씩 동유럽, 지중해, 서유럽 등의 여행을 지속했는데 나는 이 한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거다.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미 한번의 여행으로 친해진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지속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던 것. 그래도 나는 당시 내가 살던 시골에서 이미 엄청난 경험을 한 거였고,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되면 혼자 자유여행으로 유럽을 갈 거라고 다짐했고, 그걸로 다 괜찮았다. 그리고 본인도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면서 기꺼이 어린 딸을 여행 보내준 엄마한테 엄청나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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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나는 자라면서 엄마한테 딱히 뭘 사달라거나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 내 또래들 사이에서 대유행하던 나이키, 노스페이스 등의 메이커 가방이나 바람막이, 패딩 등도 한 번도 사본 적 없고, 값싼 보세나 중저가 의류를 주로 입고 썼다. 엄마가 학원을 운영하셨고 교육열도 높아서 엄마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뮤지컬배우가 되고 싶었을 때는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뮤지컬 교육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배우는 등 최대한 부모님한테 부담이 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집은 가난하진 않았고 정말 평범한 서민층이었다. 엄마는 학원 선생님이셨고 아빠는 치킨집을 하셨었다. 한 번도 뭔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매달 고정지출이 생기는 유학은 갈 수 없었지만 몇 달 허리띠를 졸라매면 2주간 유럽여행은 갈 수 있었으니까. 다만 나는 자라나는 동생이 둘이나 있는 삼남매의 장녀였고, 우리 집이 부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뭐든 부모님께 손벌리지 말고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용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수능이 끝나고 나서 거의 바로 독립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급기야 나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500만원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대책없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 유학은 다음에 이어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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