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동차 광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 한국에서 수년간 대형 광고회사에서 일한 지인이, 어떤 사람의 광고 짬밥을 가늠하기 위해서 자동차 광고를 했었는지 본다고 하더라. 주요 산업군인데다 광고 예산이 큰 편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큰 규모의 일을 해 봤는지, 얼마나 주요 팀에서 일을 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얘기해 줬었다.
- 전 회사에서는 생활/소매 쪽 광고주를 만났었다. 슈퍼마켓, 전기, 화장품 등이었는데, 각각 이마트, 한국전력공사, 아모레퍼시픽 정도이니 회사 규모 자체는 크더라도 상품의 단가에서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광고 예산이 자동차만큼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이 조금 불만족스러워서 이번에는 뭔가 다른 산업군에서 규모가 있는 광고를 해 보고 싶었다.
- 독일에서 광고일을 한다면 역시 자동차는 해봐야지. 예산과 집행 규모도 가장 크고 인지도도 높으니까.
- 자동차와 운전을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유학할 학비를 모으는 중에 새 차를 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었고.
등등의 어찌보면 매우 사소한 이유로 나는 자동차 광고가 주력인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이직을 하고 자동차 광고를 맡아 보니 내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내가 간과한 부분은, 집행할 광고의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미드레벨인 나에게는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역할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 표의 한가운데 있는 Creative/Art)
전 회사에서는 규모가 꽤 작은 프로젝트라면 주니어라도 상사와 함께 '내 프로젝트'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전 과정을 맡아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현재 이직한 우리 회사는 ECD 밑에 CD가 없고 시니어 크리에이티브들이 중간관리자와 실무자 역할을 동시에 한다. (미국은 이럴 경우 Associate Creative Director 라고 칭하는데 독일은 ACD가 거의 없다.)
그렇다보니 나는 중간에 끼인 미드레벨이라 자동차 광고가 아닌 프로젝트들은 전 과정에 걸쳐 리드 역할을 하면서 경험을 쌓고 역량을 키워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자동차 광고에서는 주로 시니어를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실질적인 자동차 일을 배울 기회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프로젝트 브리프를 받고 아이디어를 내고 최종적으로 디벨롭하는 컨셉팅 과정에서는 자유롭게 참여하지만, 광고 기획안이 광고주의 승인을 받고 본격적으로 제작 단계로 들어가면서 키 비주얼 만들기, 모델 캐스팅, 스타일링, 촬영, 편집, 보정, 녹음 등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후반작업에서는 거의 시니어를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아 했다.
당연히 이해는 간다.
수십억짜리 프로젝트에서 짬도 덜 찼고 자동차 경력도 없는 미드레벨을 뭘 믿고 맡기나.
그래서 최대한 시니어 서포트를 열심히 하며 일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자동차 광고는 기본적으로 규모가 크지만, 기존 모델이 완전히 바뀌어 나오는 경우나 아예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 경우에는 특히 신경써서 광고를 하는 편이라 광고비가 크게 잡히고, 대규모 변화 없이 기존의 차량을 살짝 손봐서 새로운 에디션을 내놓는 경우에는 특별히 새롭게 광고할 것이 많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이렇게 기존 모델의 새로운 에디션을 위한 광고의 리드 아트디렉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위로 사수나 조언자 없이 ECD와 다이렉트로 같이 일을 하게 된 거였다. 기존 모델을 광고하긴 하지만, 컨셉이 완전히 달라 충분히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고 규모도 나름대로 있으면서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규모도 아니라 자동차 광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면서 성장하기에 딱 알맞은 프로젝트였다. 너무 기뻤고, 잘 배우고 잘 해내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잘 배우기 위한 첫 단계이지만 동시에 업무적으로는 내가 아트디렉터로서 잘 해내야 하는 책임도 무거웠는데, 아무래도 첫 경험이다 보니 의욕에 비해 자동차 경력이 부족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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