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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업무일지

210504 화요일 - 새로운 직책, 책임은 어디까지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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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첫 회사에서 2년 6개월을 근무하고 이직. 

새로운 회사에서는 연봉도 올려 받고 직급도 승진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치자면 나는 가장 일을 많이 처리하는 실무자이면서, 신입도 아니고 관리자급도 아닌 중간에 끼인 위치인 거다. 당연히 나도 대리급으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려고 노력중이다. 그러다 오늘 회사에서 굉장히 찜찜한 일이 생겨 생각을 정리해 보고 다음부터는 더 잘 해내기 위해서 업무일지를 쓴다. 

 

오늘 일하던 중에 전에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Senior에게 연락이 왔다. 

A프로젝트의 결과물을 광고주에게 발표해야 하는데 결과물들이 중구난방이라면서 혹시 이게 광고주 확인을 받은 최종 시안이 맞냐고 물어왔다. 

나는 당황했다. 

 

일단 내가 손을 뗀지 시일이 꽤 지난 사안이었고, 시안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의 정리가 어지럽게 되어 있어서 맞는 폴더를 찾아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약간 걸렸고, 최종시안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그제서야 시니어가 얘기했던 중구난방 결과물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글자의 크기와 굵기가 모두 제각각이었고, 레이아웃의 그리드도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곧바로 과거의 상황들을 복기하면서 이게 내 실수인가 되짚어봤다.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몹시 찜찜했고, 하루 종일 우울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A프로젝트는 회사 내에서 가장 정신없고 정리가 안되어있는 프로젝트였고,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새로 생긴 우리 회사의 첫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처리가 계획에 따라 매끄럽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구멍난 곳 땜질을 해 가며 진행되었기 때문에 거의 일처리 과정만 보면 누더기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원래 맡고 있던 시니어가 15일간 외국으로 촬영을 가게 되어 갑자기 모든 일이 새로 들어온 나에게로 맡겨졌고, 그건 대부분 이미 1차 시안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 2차 레이아웃을 다듬고 수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잘 처리하려고 애썼다. 심지어 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배운 것들과 다음부터는 어떤 점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정리해서 자발적으로 윗선에 보고까지 했고, 당장 내일 모레에는 회사 제작부 전체회의에서 배운 점들에 대해 대표로 발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잘 하려고 애썼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업무 효율을 위해 본보기를 만들려는 노력까지 했다. 거기까진 맞다. 중간에 일이 대강 마무리 됐을 즈음에 모든 시안들을 확인했고, 마찬가지로 제각기 다른 글자 크기를 보고 분명 질문까지 했었다. 이게 원래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프로덕션의 실수인지 확인하려고. 그런데 모두 바쁜 와중이었고 원래 그렇게 기획되었다는 답변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원래 그렇겠거니 하며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으면 안 됐던 거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원래 시안의 전체적인 오버뷰를 요청해서 원래 시안이 무엇인지 파악부터 하고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내 역할이 '책임 대리' 라고 생각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열심히 했지만, 워낙 프로젝트 후반부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시안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니어가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웃으며 이제는 내가 책임자라고 했을 때에도 나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다. 나도 나의 새로운 직책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그런 큰 책임을 맡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전 회사에서는 내 업무나 실수를 대신 책임져 주는 사수언니가 있었던 탓도 큰 것 같고, 이전 회사에 비해 지금 회사가 전반적으로 직책 대비 맡겨진 책임과 기대치가 훨씬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교걸이라서 그런가, 원래부터 그런가보다 하고 나니 이견을 제시하거나 문제삼는 것도 주제넘는 짓이라 여겼던 탓도 크다. 

그리고 천성이 게을러서 적당히 넘어간 게 솔직히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매 순간마다 게으른 선택을 하는 내가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일을 하며 돈을 받고 살아가는지 나는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다.) 

 

결론은,

내가 더 신경썼어야 했고,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으며, 어떤 일을 맡던 확실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이건 이미 지적받은 적이 있어서 책상에 써붙여놓기까지 했는데도 이렇게 느슨하게 일을 처리했다니 속이 몹시 쓰리다. 

이제 나는 더이상 신입이 아닌데. 책임범위도 늘어났고 성과도 보여줘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게으르게 살 건가. 

위에 써 놓은 글을 읽어내려오니 마지막까지 나는 변명 투성이다. 

언제쯤 나는 내가 한 일에 흡족해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자괴감이 찾아오고, 나는 한동안 거기에 갇혀 괴로워하고 무기력해진다. 

그래도 배움이 있었으니까, 내가 자괴감에 빠질 걸 알고 있으니까 어느정도는 예방할 수 있겠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고, 박웅현님도 첫 삼년은 책만 읽으셨다고 했다. 

내 사주를 봐주신 아저씨도 5년을 느리지만 열심히 버티면 광명이 찾아온다고 하셨으니까, 일단 열심히 노력하면서 버텨본다. 

매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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