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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성인ADHD

3. 정신건강의학과 첫 방문과 상담 1편: 노력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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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ADHD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매체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기록임을 밝힙니다. 

잔뜩 신이 나서 집 주변 정신과를 검색해 봤다. 

남은 시간은 고작 4주. 

유명한 병원을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나는 경기도의 끝자락 지방러인데, 우리 집 근처에도 정신건강의원이 꽤나 많아서 놀랐다. 

우선 나는 모든 병원의 소개글이나 후기를 보고 확실히 성인 ADHD를 진료하는 병원을 추렸다. 

그러고 나니 후보가 몇 개 남지 않아 후기를 좀 더 찾아보고 친절하다는 곳으로 또 한번 추렸다. 

남은 후보는 단 둘. 

두 군데 모두 전화를 해봤다. 

 

정신과 예약은, 나처럼 마음이 급하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진입장벽이 꽤 높았다. 

우선 두 곳 모두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태였고, 더군다가 초진일 경우에는 예약을 아예 받지 않는다고 한다. 

먼저 병원을 방문해서 정신건강 문진표를 작성해야 했고, 어떤 문제로 병원을 찾게 되었는지, 어떤 개선점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글로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래서 곧바로 집과 가장 가까운 병원에 찾아가서 위의 항목들을 작성한 후, 예약을 잡았다.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태여서 시간이 부족한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겨우 열흘쯤 후로 예약이 되었다. 

 

 

드디어 예약한 방문 당일, 

나는 성인 ADHD 답게.... 지각했다. 

다행히 병원 분들이 모두 굉장히 친절하시고 이해심과 포용력이 크셔서 꾸지람은 듣지 않았지만, 원래 예약해 둔 시간에 시작을 못했고, 초진일 경우 상담 시간만 25분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사선생님께서 일정 중간 시간이 나실 때까지 대기했다. 

 

드디어 만나뵌 의사선생님은 굉장히 친절하셨다. 

친절이 습관처럼 온 몸에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문진표와 상담희망서를 읽으셨겠지만, 제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ADHD를 알게 되었고, 저와 너무 비슷하다고 느껴서 찾아오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제가 ADHD일 거란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적도 없고, 문제가 없진 않지만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굉장히 평온하게 살고 있었어요. 현재 직장인인데, 제가 ADHD가 맞다면 스스로를 개선시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요, ADHD가 아니라면 제가 살면서 겪은 불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개선할 문제라고 느끼셨는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우선 저는 학창시절부터 집중하는 것에 문제를 많이 겪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제가 정말 좋아하고 저에게 잘 맞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회사일을 할 때, 제가 느끼기에 재미있는 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일을 시작하기조차 힘들어요. 월급을 받고 하는 회사일인데도 대책없이 미루다가 한밤중에 잘 시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면 또 늦게 자게 되고, 다음날 피곤하고.. 일을 미루는 동안에도 신나게 노는 게 아니라 하루종일 마음이 괴롭고 스트레스를 크게 받아요. 그러면 당연히 결과물의 완성도는 떨어지게 되니까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자책하게 되고.. 가끔 미루고 미루다 급하게 처리한 일이 꽤 잘 나오면 '그래, 마감기한만 맞추면 어떻게 일하든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합리화도 잘 하고요. 그리고 사람 말을 듣는게 어려워요. 대화를 하거나 제가 주도적으로 이야기 할 때에는 상호작용이 있으니까 꽤 집중하는 편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말할 일이 별로 없는 회의에 들어가거나 세미나에 참여할 때에는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어서 내용을 많이 놓치거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을 하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적어야 해요. 그래도 100% 다 집중하지는 못하고, 끝나고 나면 너무 진이 빠져서 힘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자유로운 분위기의 광고회사가 아니라 근태에 엄격한 회사에서 근무했다면 진작에 해고당했을 것 같아요. 음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예상 시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게 문제인 것 같아요. 아주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만성적으로 모든 일에 지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중간에 일어날 변수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상 소요시간을 객관적으로 예측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요."  

 

"아이고.. 너무너무 힘드셨겠어요.! 혹시 학창시절에는 좀 어떠셨나요? 같은 문제를 느끼셨나요?" 

"그런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직업적으로 출퇴근시간을 엄격하게 따지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만성적으로 지각하는 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학교를 다닐 때에는 매일 지각하고, 수업시간에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해서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악담도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자존감도 굉장히 낮아졌었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선생님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고, 수업을 들은 적도, 공부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좋아하는 책만 읽고 항상 딴 생각을 했고요. 이상하게 성적은 나쁘지 않아서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대학생일 때에도 강의를 단 한번도 제대로 듣지를 못했어요. 지각과 결석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자느라고 아예 시험을 통째로 못본 적도 있고, 대학 때는 전과목 F를 받은 적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학점이 매우 낮았고요. 일방향적인 강의나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머리 속에 전혀 들어오질 않아서..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도 항상 늦어서 좋은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많았고요.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일도 많았고요,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에 꽂히면 지금 당장 그걸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안절부절하기도 하고요. 책상에 오래 앉아있거나 가만히 있는게 고문처럼 힘들었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잠을 자고, 잠 조절이 너무 안돼서 낭패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고요. 음.. 그리고 상습적으로 지각을 해서 직장에서 짤린 적도 있었는데, 그 때는 그게 문제가 되는지 조차 몰랐어요. 지금은 적성에 맞는 일을 찾게 되어서 꽤 안정적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꼭 시도해 보고 싶어요." 

 

모든 상담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신 의사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으셨어요. 정말 너무 노력하면서 사셨겠네요. ADHD를 가진 분들은 남들보다 두배 이상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해요." 

"네? 아.. 그런가요" 

 

당시에는 읭? 하며 지나간 말이었다. 

노력을 하면서 살았다고? 내가? 무슨 말이지, 저게..? 

 

하면서 혼란스럽게 지나쳤던 선생님의 그 말씀이 

웬일인지 머릿속 깊은 곳에 남았다가, 며칠 후부터 계속 떠올랐다. 

 

노력을 하면서 살았던 거구나... 

나는 노력이란 단어를 너무 막연하고 거대하게 생각했었나 보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지 않아서, 생산적인 일을 끈질기게 하지 않아서, 매번 할 일을 미뤄서, 남들처럼 열정을 불태워서 결과를 창출하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막연히 '노력'이라는 단어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그것은 내가 너무나 하고 싶지만 그동안 전혀 해오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력이라는 걸 평생 해보지 못한 나태하고 게을러빠진 인간이라 아주 글러먹었다고, 그저 운좋게 그냥저냥 어설프게 사람구실이나 하면서 사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노력도 재능이고, 나는 그 재능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라고 결론지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아직도 확실히 답을 할 수는 없다. 과연 내가 해 온 것에 노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누군가는 나를 보고 저딴게 노력이라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노력이란 단어에 진입장벽이 왜 이렇게 낮은거냐고, 정말 보편적인 이미지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 들으면 세상 억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렸다.

뭐하나 제대로 시작하지도 끝마치지도 못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보려고 계속 시도했던 것이, 뭔가를 해야 할 때 미룰지언정 손에서 놓지 않고 꾸역꾸역 하려고 붙잡고 있었던 것이, 패배자가 되기 싫어서 어거지로 마침내 뭔가를 끝마쳤던 것이, 왜 노력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괴로워하고 어떻게든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던 것들이 결국 나의 노력이었던 거라고. 그동안 다 놔 버리지 않고 노력하며 살아온 거라고 말해주신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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