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읽는 분께,
제발 저와는 다르게 실제 용도를 잘 생각해보시고 구매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내가 부모님께 딱 하나 물려받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현명한 소비 습관이다. 그래도 지난 10년간 열심히 벌고 열심히 써 본 결과 하나 깨달은 것은, 자잘한 소비를 아껴서 통 크게 지르는 것이 더 오래 쓰고 만족도가 크다는 것.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큰 마음을 먹고 원대한 계획을 앞세워 지른 아이패드가 내 생애 최악의 소비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정말 몰랐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광고회사에 재직중인 아트디렉터다.
나는 만화를 그렸었고, 앞으로도 그릴 예정이 있으며,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 봤고, 앞으로도 만들 생각이 있다. 또한 나는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 학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기에 아이패드 프로를 사는 것은 내 취미생활과 생산적인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말이 되니까. 저렴한 미니나 에어를 사기보다는 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위해서 아이패드 '프로'를 사서 만화도 그리고 영상도 만들 계획이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포토샵, 인디자인, 프리미어프로, 애프터이펙트 등의 어도비 툴과 아이디어로 먹고 사는 인간이니까, 비록 손그림은 엉망이지만 만화도 그릴 거고 유튜브 영상도 만들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애플펜슬이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고 내장그래픽 또한 짱짱한 아이패드 프로를 산 거였다.
이왕 생산적으로 쓸 결심을 했으니, 응당 생산성에 걸맞는 지름신이 강림했었다. 애플케어는 당연하고, 클라우드 시대에 용량도 무려 500기가로 샀다. 영상편집 할거니까 용량은 커야지. 거기에 글도 쓰고 업무도 할거니까 정품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까지 샀다. 소수점 반올림해서 1635유로는 오늘자 환율로 220만원이다. 여기에 액정필름 종류별로 몇 장 사고 애플펜슬 실리콘 케이스 사고, 필기감 좋게 만들어주는 펜팁들도 샀다. 그러니까 못해도 230만원은 아이패드에 투자한 셈이다.
내가 간과한 것은 나를 구성하는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나의 내적 요소였다. 나의 진짜 취미는, 웹툰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작해보고 곧 그만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두고 '끈기 없다', '노력이 부족하다', '의지가 없다' 면서 폄하하지만, 나는 얼마 전 그런 자아비판에서 약간 해탈한 상태고 그냥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취미'라 칭하기 시작했다. 이 내적인 변화는 모두 내 생애 최악의 소비인 아이패드 프로 덕분이다. 그러면 최악의 소비에서 얻은 점이 있는 건가?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아이패드 프로를 구입한 후 1년 4개월 동안 단 두장의 그림을 그렸고, 수업에 활용한 적은 거의 없고, 일기도 거의 안 썼으며, 영상은 단 한번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유튜브도 광고 때문에 노트북으로 본다. 내가 아이패드 프로를 쓰는 곳은 한때 열심히 썼던 일정 기록을 제외하면 오로지 자명종과 모바일게임 뿐이다.
나는 아직도 메모를 종이와 연필로 한다. 그게 훨씬 편하고 종이에 사각사각 원하는 대로 쓰는 느낌이 너무 좋다. 아직까지 애플펜슬은 연필과 펜을 절대 대체할 수 없다. (나는 종이필름도 써봤다) 그리고 영상 시청은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로 한다. 광고도 제거할 수 있고 화면과 소리도 훨씬 크니까. 블로그의 글도 아이패드로 쓰려고 수없이 시도했지만 결국 노트북으로 쓴다. 훨씬 편하니까.
매일매일 쓰던 맥북프로와 아이패드 미니를 독일에서 도둑맞은 김에 노트북 대신 쓰려고 산 아이패드지만, 여전히 아이패드는 노트북을 대체할 수 없고 컴퓨터가 활용도가 넘사벽으로 더 뛰어나다. 그래서 10년 전에 산 할머니 맥북프로를 인공호흡기 달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맥과 애플 생태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이기 때문일까? 나는 11년 전부터 맥북프로, 맥북에어, 맥북 및 아이맥 여러 대, 아이패드, 아이폰3gs부터 12까지, 옛날 아이팟 플레이어들과 요즘 에어팟까지 애플 제품만 질리도록 쓴 진성 애플 이용자다. 애플 생태계도 훌륭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는 절대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대체할 수 없고, 그 사이에 끼인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나는 아이패드 미니가 딱 맞는 사용자다.
가격도 정말 저렴하고, 작아서 휴대성은 너무 좋으면서도 영상을 보기에 충분히 큰 화면과 스피커, 애플펜슬과 키보드까지 지원된다. 게다가 저렴한 가격 때문에 미니를 가지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게임, 영상시청, 소셜미디어만 즐겨도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가끔 그림을 그리거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하거나, 문서를 열어 확인하고 수정하는 등의 아주 소소한 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마다 뿌듯함까지 엄청 차오른다.
당신에게 아이패드 프로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
- 만약 애플펜슬을 이미 사용해 봤고, 애플펜슬로 필기하는게 너무 편하고 좋은 대학생이라면? -> 아이패드 에어
- 필기용으로 활용하고 싶은데 연필과 종이가 좋은 사람이라면? -> 종이와 연필
-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꾸준히 그림을 그려 온 사람이라면? -> 아이패드 프로를 살만 하다.
- 내가 영상을 꾸준히 만드는 사람이라면? -> 하던 대로 컴퓨터로 영상 편집을 하면 된다. 아이패드 프로는 필요 없다. 아이패드용 영상편집툴을 새로 배워야 할 뿐이다. 휴대성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가볍고 저렴한 노트북이 낫다.
- 내가 아이패드프로를 사서, 돈을 많이 썼으니 많이 활용해서 뽕을 뽑을 자신이 있고, 원래 하지 않던 새로운 일들을 아이패드 프로를 활용해서 시작할 계획이라면? ->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해왔던 게 아니라면, 결국 안 할 거다. 사람이 바뀌는 건 참 어렵고, 일상이 바뀌는 것도 쉽지 않다. 아이패드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혁신적으로 생활양식을 바꾸는 물건은 절대 아니다. 그 사이에 끼어 특수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끼워팔기 물건일 뿐이다. 그 물건이 적당한 가격이라면 기꺼이 소비하겠지만, 아이패드 프로는 절대 적당한 가격이 아니다.
나는 아이패드 프로를 사기 전에 많은 유튜브 영상과 블로그 후기글들을 보았다. 아이패드 프로를 구입해서 잘 쓰고 있다며 인증과 추천 형식으로 올린 영상과 글들을 보다 보면, 마치 나도 저들처럼 굉장히 생산적으로 잘 활용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계속해서 뽐뿌가 온다. 나는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한꺼번에 도둑맞고 나서 무려 한달 반 정도를 고민했다. 노트북을 살까, 아이패드 프로를 살까. 어느 면으로 봐도 나에게는 노트북이 맞는 선택이었지만 어차피 나는 회사에서 지급받은 업무용 노트북이 있었고, 또 절대 애플펜슬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애플펜슬마저, 종이와 연필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며칠만에 느끼고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아이패드 프로를 통해서 아주아주 비싼 교훈을 얻었다.
중고로 팔고 아이패드 미니를 구입하고 싶지만 게으른 나는 여태까지처럼 엄청 비싼 자명종으로 쓸 가능성이 높다.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 5세대 혹은 아이패드 프로 11인치 3세대 구매를 고민하는 분들께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일기 >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바이오틱스 대신, 아침엔 오버나이트 요거트 오트밀 - 타임지 선정 슈퍼푸드의 진실 (0) | 2021.04.28 |
---|---|
다큐후기/누설없음)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 환상적인 케이프타운의 바다와 아름다운 우정. (0) | 2021.04.28 |
TV후기) 유퀴즈 청년문간 이문수 신부님 (0) | 2021.04.26 |
물건 후기) 테팔 다지기 - 오므라이스 만들기 (0) | 2021.04.14 |
영화 후기) 퍼펙트 케어 (I CARE A LOT) = 페미니즘+사회비판+권선징악 (0) | 2021.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