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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돈굴리기

10년간 현금 흐름 정산 - 서른 살 직장인 모은 돈, 유학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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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00만원 (빚 800만원 + 저축 0원) 

스무 살이 되었다. 

나는 열아홉 수능이 끝나자마자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한달 후 급여를 받고나서 바로 고시원을 얻어 집에서 물리적으로도 독립했다. 

대학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해결했고, 생활비 및 방세 등등은 부업을 하며 해결했다. 

저축개념이라곤 없었고, 버는 족족 써제꼈다. 그러다 보니 버스비 천원이 없어 한시간 거리를 걸어가기도 했다. 

스무살의 낭만이라고 치자. 

 

2011년) -1200만원 (빚 1200만원 + 저축 0원) 

스물 하나. 

대차게 싸우고 독립했던 스무살을 지나, 거의 일년 간 연락조차 않던 부모님과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집에서 사니 방세 나갈 일은 없어서 부업으로 번 돈을 좀 더 자유롭게 써제꼈다. 

집으로 돌아가니 부모님과 여전히 싸우게 되더라. 

 

2012년) -700만원 (빚 1200만원 + 저축 500만원) 

스물 둘.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유학을 가기로 결심. 

영어강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펑펑 써제껴도 돈이 좀 남았다. 

유학 결심이 무색하게 정말 열심히 쓰면서 살았다. 일단 쓰고 싶은 건 다 쓰고, 돈이 남으면 그게 그냥 저축한 셈이 되었다. 월급을 받으면 얼마 따로 저축통장으로 빼놓고 남은 돈으로 계획적으로 소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통장은 달랑 한 개였고, 체크카드를 긁으면서 아무생각 없이 살다가 남으면 남는대로 돈이 모였다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큰 거 하나 지르고 또 원상복귀. 

게다가 남자친구가 타던 차를 받아서 타고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서 첫달 기름값만 80만원을 썼다.

 

2013년) -2200만원 (빚 2200만원 + 저축 0원) 

스물 셋.

상반기 인턴십을 마치고 여름에 샌프란시스코 유학길에 올랐다. 달랑 500만원 들고. 

정부가 노숙자들에게 내어주는 가구 단지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해가 지면 늘 휴대전화에 911을 쳐놓고 언제든 유사시에 누를 수 있게 준비해 놓고 걸어다녀야만 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천만원을 빌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 또한 돈도 없고 신용도 바닥이어서 대부업체 대출을 받아서 줬던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딱서니가 없어서 어이가 없다. 

결국 6개월 후 겨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샌프란 유학이야기는 따로 글을 쓸거다. 얘기할 게 많아서. 

 

2014년) +200만원 (빚 2200만원 + 저축 2400만원) 

스물 넷. 

반년만에 유학에 실패해서 돌아온 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좀 쉬고 싶었는데 엄마의 권유로 강사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다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한달에 200만원씩 저축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썩 이해가 가진 않는다. 한달에 200만원 적금 하나 들어놓고, 적금 붓고 남은 돈은 모조리 써버렸다. 적금이 있으니 괜찮다고 위안하면서. 당시 한달 수입은 들쭉날쭉했지만 최소 300만원에서 많으면 380만원 정도였는데, 나는 심지어 돈없어서 유학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주제에 또 차를 사서 끌고다녔다. 

 

2015년) +2600만원 (빚 2200만원 + 저축 4800만원) 

스물 다섯. 

새 차를 뽑았다. 미친 건가.

그당시 생각으론 꾸진 중고차가 좀 창피하기도 했고, 쉐보레에서 영업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아빠한테 조금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월 200만원씩 적금은 붓고 있었지만, 취등록세, 보험료, 다달이 나가는 자동차 할부금과 기름값으로 많은 돈이 빠져나갔다. 학원에 과외에 부족하지 않게 벌고 있어서 차를 타고 다니는데도 돈을 아껴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간 모은 돈에 약간 더 보태서 외제차나 한 대 뽑고 유학가지 말고 그냥 이대로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별 걱정 없이 편하고 재미있게 살았다. 그 늪에 빠지지 않아 다행이다. 

 

2016년) +876만원 (빚 1876만원 + 저축 1000만원)

스물 여섯. 

학원과 과외는 진작에 그만두었는데 학교 진학을 몇달 미뤘다. 여태껏 부업 한번 쉬어보지 못하고 달렸는데 좀 쉬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정신머리 없었던 거다. 몇 달 쉬면서 거의 천만원을 썼다. 유학가려고 모은 돈이었는데,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적금이 만기가 된게 신나서 그랬나보다. 미친거지. 게다가 드디어 다달이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 상환이 시작되었다. 

여름에 독일로 유학을 오고, 한국에서 돈 쓰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나는 정말 열심히 돈을 쓰고 다녔다. 밥은 꼭 푸짐하게 외식을 해야 하고, 외식을 할 때는 당연히 곁들이는 작은 요리나 술이나 음료도 꼭꼭 시켜서 먹어야 하고, 담배도 사 피워야 하고, 독일에 왔으니 시간이 나면 여행도 여기저기 다녀야 하고. 

 

오늘은 현금 흐름을 정산하고 싶었던 건데, 나름대로 나는 잘 살아온 줄 알았는데.. 돈으로 판단하려고 하니까 왜이렇게 나 자신이 한심하고 멍청해보이냐. 속이 쓰리다 속이 쓰려. 

 

2017년) -3400만원 (빚 3400만원 + 저축 0원)

스물 일곱. 유학온지 일년 후 여름에, 가진 돈이 모두 다 떨어졌다. 

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대체 왜 이따위로 살았을까? 왜 우리집엔 돈이 없을까? 왜 나는 현명하게 돈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걸까? 

온갖 질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인데, 이때는 정말 힘들어하다가 여기저기에 도움을 요청하고 손을 벌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비를 유예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취업하면 학비를 나눠서 내기로 했고, 여기에 더해서 남자친구에게 생활비로 쓸 돈을 빌렸다. 부업을 하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일단 독일어도 못하고 학교생활이 정말 바빠서 번번이 하지 못했다. 내가 나약해서 그런 것 같다. 나보다 더 독하고 똑부러진 사람이었으면 충분히 해냈을텐데. 하긴 애초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던 거다. 

 

2018년) -2750만원 (빚 2750만원 + 저축 0원) 

스물 여덟, 사회 초년생

다행히 졸업하자마자 좋은 회사에 취업했고, 한 달에 130만원씩 독일 학자금부터 갚아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학자금은 2016년 부터 다달이 계속 갚는 중. 월급 받아서 세금으로 140만원, 학자금으로 130만원, 월세로 70만원씩 빠져 나가니 돈 번다는 기쁨도 잠시였고, 매달 빡빡하게 살아야 했다. 그래도 이때 아껴쓰는 법을 약간은 배운 것 같다. 

 

2019년) -2150만원 (빚 2150만원 + 저축 0원) 

스물 아홉. 2년차 직장인

직장에 적응하고 여전히 빚부터 갚는다. 독일 학자금 대출은 다 갚았고, 한국 학자금 대출도 거의 다 갚아가지만, 빚을 너무 빡세게 갚느라 결국 재앙이 하나 생겼다. 마이너스 통장. 마통 한도인 700만원까지 열심히 끌어다 썼다. 이자는 8.9%였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게 아닌가 싶긴 한데, 결국 스트레스성 소비였던 것 같다. 매달 똑같은 월급에 매달 똑같이 돈을 갚고 나면 남는 건, 치약처럼 쥐어짜서 아껴 써야만 생활이 가능한 부스러기같은 생활비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바보같아 보이긴 한다. 

 

2020년) -850만원 (빚 2150만원 + 저축 1300만원)

서른이 되었다. 어느새, 3년차 직장인.

은행빚과 학자금, 마이너스통장을 모두 다 갚았다. 

엄마한테 꾼 1천만원은 언제 갚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고, 엄마도 갑자기 내가 빚을 다 갚은 시점부터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수익이 좋아서 일단은 갚지 않고 있다. 엄마는 지금도 종종 말씀하신다. 내가 필요할 때 돈을 잘 벌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근데 어쩔 수 있나. 내가 그냥 부모님한테 금전적으로 큰 도움은 못받는 팔자인가보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남자친구한테 생활비로 꾼 1150만원은 내가 40살이 되면 갚기로 했으므로, 일단은 갚지 않고 내 몫으로 드디어 돈을 좀 모아봤다. 

다가오는 2021년 1월에 이사하고 이직하면서 이래저래 몇백만원이 훅 빠져나가긴 하지만, 일단 2020년 12월 31일에 내 수중에는 1300만원이 있었다. 엄청나게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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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들에게 가장 만만하고 저렴한 요리 - 정체불명의 파스타. / 2013년 7월 트레져아일랜드, 전 방주인이 해줬다.

나는 이상하게 뒤틀린 자부심과 자기연민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부모님과 싸우고 집에서 가출한 것을 '경제적 독립'이라고 칭했고, 남들은 부모님이 대학등록금도 대 주시고 용돈도 주시는데 나는 그런 것 일절 없이 학자금 대출 받고 생활비는 벌어서 쓰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등록금과 용돈을 받는 친구들을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고, 내 부모님께는 은근히 '집에 손 안벌릴테니 내 생활에 참견 말라'라는 식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결국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벌려놓고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동갑 친구와 이야기하던 도중 그 친구가 "우리 부모님은 나 대학등록금 내주고 용돈도 주고 때때로 여행도 보내주시지만, 그게 우리 부모님께 아무런 타격이 없고 해주고 싶어서 해주시는 건데, 그럼 나도 받을 수 있을 때 받고 그걸 양분으로 잘 성장하고 성공해서 나이 드셨을때 효도해드리면 되는 거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다. 

이게 결정적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틀린 말 하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을 당시에는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일단 내가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집이랑은 너무 다른 환경이었고, 내 주변에 대학등록금에 용돈까지 주시는데 아무런 타격이 없는 부모님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든 생각은, 각자의 환경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집에서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는 대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대학생들은 기회의 빈도나 크기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부업할 필요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고, 필요하면 더 배우러 학원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며, 대외활동까지 할 수 있는 사람과, 학교에서 수업듣는 시간을 제외하면 부업에 시달리며 시간을 쪼개 공부하는 학생들은 너무 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상한 자기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집 형편은 좋지 않아. 나는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도움받을 수 없어. 부잣집과 가난한 집은 밥상머리 교육부터가 다르대, 진짜 유산은 부자들의 사고방식을 물려주는 거라더라. 그런데 나는 받은 것도, 받을 것도 없이 나중에 나이가 들면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거구나. 학교다니면서 부업까지 하기 힘들어. 부업도 지겨워. 한달만 일 없이 쉬어보고 싶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너무 힘든 것 같아." 

 

이런 식의 뒤틀린 자기연민과 남과의 비교는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건 꽤나 최근이다. 

나는 부유하거나 넉넉한 집의 자식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겼고, 속으로 몰래 편하게 살았겠구나 멋대로 추측했고, 나 스스로에게 약간의 불쌍함을 느꼈고, 또 반대로 내가 스스로를 가여워할수록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부모님을 흉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그런 스스로에게 질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도 커졌다. 

 

나는 그냥 그런 환경이었던 거고, 

나보다 분명히 금전적으로 넉넉하고 기회가 많은 사람들도 있는 거고,

나보다 분명히 더 힘들고 더 부족하고 기회가 적은 사람들도 있는 거다. 

 

얼마 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나라는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너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빈부격차로부터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훨씬 더 큰거라고. 계층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아예 서로 다르게 사는 유럽 나라들은 오히려 서민층의 행복 지수가 더 높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문제는, 

남과 비교하면서 나를 가늠해보는 거고, 그게 정말로 내 행복에 도움이 안된다는 거다. 

나는 그나마 부모님을 부양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외국으로 나가서 살 수 있었던 거고,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님과 남자친구에게 손을 벌려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것도 내 복인거다. 

또 나는 소비습관을 제외하면 나는 가정교육도 잘 받았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능력이나 장점들도 정말 많다. 그걸 잘 활용해서 살면 되는거고, 실제로 지금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앞으로 남들을 부러워하거나,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면, 나는 자기연민보다는 나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금전기부를 하거나 재능기부를 하겠다. 그게 훨씬 건전한 결론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유학을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상처가 되어 날 괴롭힌다면, 나에겐 이미 지난 일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잘 살고 있으니 신경쓰지 말고, 대신 공부하고자 하지만 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수도 있고, 그런 일을 하는 재단에 돈을 기부할 수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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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잘 써지지 않고 결론도 잘 나지 않는 글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지난 10년간 소비습관이 엉망이었으므로 앞으로는 현명한 소비를 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옛날엔 저런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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